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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

[책/리뷰] 죽기 전에 논어를 읽으며 장자를 꿈꾸고 맹자를 배워라 - 김세중 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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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대 지 식 동 양 고 전



죽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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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를 읽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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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를 꿈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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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를 배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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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중 편저






군대에 있었을 때, '3분 古典(박재희 저)'이란 책을 읽다가 무릎을 탁! 하고 친 적이 있었다. 원래부터 공자왈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 글귀를 너무나 좋아하고 있었던 터에, 역시 논어에 나온다는 '己所不欲 勿施於人(기소불욕 물시어인)'이라는 글귀를 읽고 무릎을 탁! 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부터 '내가 싫은 것은 남도 싫다'라는 주의로 살아오고 있기 때문에, 그래도 누군가를 때리는 것도, 남을 욕하는 일도 되도록 삼가려고 하고 있다. 내가 싫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이를 이미 멋진 글귀로 만들어놓았던 공자의 논어 일부분을 읽으며 새삼 논어를 다시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자님 말씀이 적힌 논어를 제대로 읽어본 적도, 아니 그 전에 기회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논어'에 대해 찾던 중 이모네 집에서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이란 책을 보게 되었는데, 그 내용이 너무도 어렵고 나와 맞지 않아서 포기하고 찾던 중에 알게 된 책이 바로 '죽기 전에 논어를 읽으며 장자를 꿈꾸고 맹자를 배워라'였다. 해당 글귀에 대한 성인의 이야기와 명언의 역사적 사례를 차례로 들면서 쉽게 이해시켜주고 있다.



「공자편」


"두번이면 족하다." (56쪽)


춘추시대 노나라의 계문자라는 재상이 항상 신중하여 세 번이나 생각한 뒤에 일을 결정하곤 하였는데, 이에 대해 공자님은 너무 많은 생각은 오히려 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의미에서 "두 번이면 족하다"라고 했다고 한다. 나도 꽤나 신중하려고 하는 편으로, 특히나 물건 구매에 있어서는 하염없이 시간을 흘려보내곤 하는데, 이것이 분명 더 나은 선택을 함에 있어서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스스로를 너무 피곤하게 만드는 경향이 없잖아 있는 것 같다. 좀 더 빠른 결단이 필요한 것 같다.



"저는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부지런히 공부하는 사람은 이제 막 솟아오르는 아침 태양처럼 앞날이 창창하고 중년에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은 정오에 내리쬐는 태양처럼 비록 반나절밖에는 그 빛을 내리쬘 수 없지만 무척이나 강렬한 빛을 머금는다고 했습니다. 노년에 이르러서야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은 촛불과 같아 감히 태양빛과는 견줄 수 없겠지만 깜깐한 어둠 속에서 앞을 못보고 헤매는 것보다는 천 배 만 배 낫다고 생각합니다!" (76쪽)


시작이 반이라 했다. 늦는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이르다는 말도 있다. '어느 99세 어른의 수기'도 떠오른다. 하지 않고 아쉬워하는 것보다는 뭐든 하고 후회하는 것이 덜 후회한다고 한다. 나는 이제 고작 한 평생의 3분의 1도 채 살지 않았다. 앞으로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모르는데, 벌써부터 낙담하고 포기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힘을 얻는다. 다른 누군가도 힘을 얻었으면 한다. 아자!



공자의 제자 중에 '자로'라는 인물이 있었다. 사사건건 공자에게 태클을 거는 모습을 이 책을 통해서 엿볼 수 있었는데, 그만큼 격이 없이 제자를 대한 공자의 성품이 느껴지기도 했고, 또 한 편으로는 완벽을 깨고 싶은 심리가 자로에게 있지 않았나 싶을정도로 꼬치꼬치 캐묻는 것들이 많았다. 그러나 덕분에 공자의 명언은 한 층더 생기를 얻었으니, 훌륭한 스승에 뛰어난 제자가 아니었나 싶다.


그렇다고 공자님이 항상 언행일치의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던 듯 싶다. 그도 결국 한낱 인간에 불과했기 때문인 것일까? 한 평생을 자신이 모실 군주를 찾아다녔건만 결국 이에 실패하였다고 한다. 예법을 무시한 노나라 군주의 편을 들었던 모습(60쪽)이나 자신에게 곤란한 질문을 던지는 재야를 힐난하는 모습(39쪽)을 통해 공자님의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서두에 밝힌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의 뜻은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니, 자신의 일을 즐기면서 하는 자가 최고의 경지에 오른 자라는 뜻이다. 나도 내가 잘 알고, 좋아하며, 즐길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길 바라본다.


'己所不欲 勿施於人(기소불욕 물시어인)'은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뜻으로 평소 나의 신념과 너무도 잘 들어맞는 글귀이다. 내가 싫은 거, 남에게 강요하지 말자.



「장자편」


장자편에서는 특이하게도 장자에 얽힌 이야기 보다는 공자나 혹은 다른 인물들과 글귀가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놓아서 짐짓 놀랐다. 물론 장자님과 관련된 이야기도 몇 개 소개하고 있으나 이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음에, 공자편이나 맹자편과는 다른 구성에 의아했다. 혹시 장자님과 관련된 일화는 잘 전해지지 않고 있는 것인가?



책에는 '기술이 숙달되어 경지에 이르다'라는 뜻을 가진 사자성어 '目無全牛(목무전우)'를 설명하면서 왕숙원이라는 자가 나무를 조각하는 솜씨가 뛰어나 핵주라는 것을 조각하였다고 나왔는데(182쪽), 그게 뭔가 솜씨가 궁금하여 인터넷을 뒤져보니 결코 찾을 수가 없었다. 일말의 자료라도 남아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살짝 남았다.



내가 보기에 인과 의를 가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에는 이렇다 할 기준이 없거늘 내 어찌 그것들 사이의 차이를 알겠느냐! (190쪽)


어느 것을 비교해도 절대적 기준은 없다는 의미로 얼마 전 읽은 책_물리학 클래식_에서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설명하며 '절대 좌표계'는 없다는 얘기를 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과학적으로도, 그리고 인문학적으로도 절대성은 없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절대성이란 '부모님의 내리사랑'정도라 하겠는데, 흉흉한 사건사고가 많은 요즘같아서는, 이것마저도 역시나 절대성이 보장되지는 않는구나 하는 생각에 매우 씁쓸하기도 하다.



매미 한 마리가 빽빽한 나뭇잎 사이에 숨어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사마귀가 갑자기 나타나 팔을 뻗어 단번에 매미를 낚아챘다. 사마귀는 매미를 잡기 위해 자신의 행적을 드러내었고, 새는 이 순간을 이용해 사마귀를 잡아 먹었다. 새는 눈앞의 먹이에 정신이 팔려 자신의 본성을 잊었다. (202쪽)


마치 먹이사슬마냥 사마귀는 매미를, 새는 사마귀를, 그리고 다시 새는 인간이 잡으려 했다는 이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다. 그런데 이게 장자님의 얘기였다니. 몇 번 나오지 않는다는 장자편에서의 장자님 이야기 중 기억에 꽤나 오래도록 남을만한 이야기다.



"흰 말은 말이 아니다." (208쪽)


전국시대 조나라 사람인 공손룡이 했다는 말로 인터넷을 찾아보니 그 속 뜻을 조금은 알겠는데, 이를 궤변이라고 하는 것은 이 말이 잘 못되었다는건지 아니면 이런 말은 궤변이라고 할 수 있다는 날카로운 지적인지 언뜻 이해가 잘 안간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바다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는 개구리가 환경의 제약을 받기 때문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여름철을 사는 벌레는 얼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이는 시간의 제약을 받기 때문이지요. 허나 지금 당신은 편협한 강을 벗어나 바다를 보고 자신의 미숙함을 깨달았으니 이는 아주 큰 발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하의 물 중에 바다보다 더 큰 물은 없습니다. 수십 개의 강물이 쉬지 않고 바다로 흘러들어 오지만 바다는 결코 차서 넘침이 없지요. 반대로 바닷물은 수십 개의 강물로 물을 흘려보내기도 하지만 결코 모자란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이유로 스스로를 잘났다 여긴 적이 없습니다. 나는 이 우주에서 그저 하나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224쪽)



「맹자편」


'책만 믿는다면 책이 없는 것만 못하다'(268쪽)라며 그 예로 명나라 시대의 유명한 약학자 이시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기존에 쓰인 약학 서적들의 오류가 많음을 보고 직접 돌아다니며 그 약초의 효능을 확인하며 책을 완성해나갔다. 그렇게 탄생한 책이 바로 '본초강목'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허준이 집필한 동의보감과 함께 한약을 다루며 흔히 듣던 책이름을 이렇게 만나니 또 반가움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자료를 좀 찾아보니 동의보감이 본초강목을 참고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한다. 본초강목도 방대한 자료를 서술하였다고 하던데, 동의보감은 동의보감만의 특색을 지녔다고 하니, 왠지 후손된 자로서 으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송나라 사람이 곡식의 싹이 빨리 자라지 않는 것을 걱정해 싹을 슬쩍 위로 뽑아 올렸다. 그러고는 피곤한 기색으로 집에 돌아와 가족에게 "힘들어 쓰러지겠소. 내가 싹이 빨리 자라도록 했소!" 라고 말했다. 아들이 서둘러 밭으로 가보니 곡식은 이미 말라죽어 있었다. (309쪽)


'揠苗助長(알묘조장)'이라고 하는 이 사자성어는 이솝 우화 중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떠올리게 했다. 참고로 이솝은 고대 그리스 우화작가로 기원전 6세기 경의 사람이라고 한다. 장자(기원전 369년 ~ 기원전 286?년)나 맹자(기원전 372년 ~ 기원전 289년)뿐만 아니라 공자(기원전 551년 ~ 기원전 479년)보다도 앞선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네!



술은 아직 따뜻한데 화웅의 목은 떨어졌네 (327쪽)


그 유명한 삼국지를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어서 잘 알지는 못하나 술잔이 식기 전에 적장의 목을 베어왔다는 이야기는 삼국지를 읽어보지 않았더라도 많이 들어본 이야기다. 지위가 낮은 사람이 큰 일에 나서는 것이 경거망동한 일임을 일깨우기 위해 한 사자성어 '位卑言高(위비언고)'의 역사적 사례에서 관우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능력이 뛰어난 관우가 오히려 인정받게 된 계기가 됐음을 알려주었다. 앞서 장자편에서 얘기하지 않았던가. 절대적인 것은 없다고. 다 때에 맞게 써야 하는 법이다.



맹자와 장자는 비슷한 시기에 산 사람들이며, 공자는 이보다 먼저 살았던 사람으로 보인다. 비록 공자가 평생을 함께할 군주를 못 만난 채 여기저기를 떠돌았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이렇게 한 곳에 얽매지이 않은 채 자유롭게 방랑하며 제자를 키우고 유가 사상을 창시한 것이 후대에 이르러 더 높은 평가를 받게 된 원인이 되지 않았나 싶다. 장자 이야기는 너무 어려웠고, 맹자 이야기는 귀에 들어온게 별로 없었다. 역시 난 공자님 팬인 것 같다. 앞으로 기회가 닿는다면, 논어만 전문적으로 좀 더 파고 들고 싶은 생각이 든다.



즐거웠다면, 그걸로 O.K





손가락 꾸욱~! 글쓴이에게 힘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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